종이 위의 도장은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작은 원이 사람의 발목을 잡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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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전날 골목에서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봉투를 내밀던 장면 다음 날 새벽, 은재는 옥탑방 우편함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옥탑방 우편함에 꽂힌 등기 안내장은 며칠째 은재의 신경을 긁었다. ‘받아야 한다’는 마음과 ‘받는 순간 끝난다’는 마음이,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밀어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고, 은재의 손끝은 늘 조금 저렸다.

은재는 결국 우체국에서 등기를 받아 들고 돌아왔다. 봉투는 생각보다 얇았다. 얇아서 더 무서웠다. 얇은 종이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은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 안. 전기장판 위.

은재는 봉투를 열었다.

문서 하단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법인명은 길었고, 길어서 더 애매했다.

도성시설관리 주식회사

은재는 ‘도성’에서 눈이 멈췄다.

어디서 봤다.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은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확실하면 분노라도 할 수 있는데, 애매하면 자기 탓을 하게 되니까.

은재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편의점 새벽 2시.

은재는 문서를 복사기에 올려두고도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복사를 하면 현실이 더 선명해질까 봐.

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늘 그렇듯 물과 견과류.

“안녕하세요.”

“네.”

은재는 종이를 다시 가방에 넣으려다, 결국 한 문장을 꺼냈다.

“이 이름…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도현은 종이를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은재가 오늘 버티는 방식이 무너질까 봐.

대신 도현은 생활 문장으로 말했다.

“복사본… 한 장 더 만들어두세요.”

은재는 그 말이 ‘모른 척’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은재는 복사 버튼을 눌렀다.

종이가 나오는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컸다.


경비실.

도현은 로비 동편 CCTV를 봤다. 1초 블랙아웃. 아직은 잠잠했다. ‘아직’이라는 말이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도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음성메모.

“도장은… 종이에만 찍히는 게 아니에요.”

도현은 재생을 멈추고, 작은 메모지에 적었다.

  • 등기(도성시설관리)
  • 로비 간판(도성FM)
  • 점검표 서명(필체 불일치)

도현은 ‘이제 알겠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봐야 한다’ 쪽으로 움직였다.


로비 벽면의 금속 글자.

도성FM

도현은 그 글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봤다. 문서의 법인명과 한 글자씩 어긋나게 닮은 이름.

바로 아래, 아주 작은 안내문.

관리: 도성시설관리(주)

작고, 잘 안 보이는 글씨.

그래서 더 무섭다. 사람들은 작은 글씨를 잘 안 보니까.

도현은 그 글씨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전기함 앞에 표지판을 하나 더 세워두었다.

점검 중 / 접근 금지

싸우지 않고, 흐름을 망치는 방식.


편의점.

은재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서은재 씨, 도장만 찍으면 돼요.”

은재는 잠깐 손이 멈췄다.

‘도장.’

단어가 너무 쉽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도현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계산대로 오지 않았다. 은재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거리.

“밖에… 서 있는 사람 있으면, 문 열지 마세요.”

은재가 도현을 봤다.

“도현 씨는 왜 이렇게 조심해요.”

도현은 이유로 답하지 않았다.

“조심하는 게… 덜 아프니까요.”

은재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 말이, 너무 맞아서.


새벽 5시.

로비 동편 CCTV가 1초 꺼졌다 켜졌다.

복구된 프레임을 멈춰 보자, 전기함 앞 바닥에 막 찍힌 듯한 붉은 타원 자국이 한 컷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도현은 뛰지 않았다. 뛰면 실수가 되니까.

휴대폰에 음성메모가 도착했다.

“그 도장… 오늘도 찍혔어요.”

도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주 낮게 말했다.

“내일도 찍히게 둘 순 없지.”

편의점 화면 속 은재는 봉투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도성시설관리(주) — 확인 필요

은재는 그 글자를 다시 한 번 봤다.

어디서 봤더라.

그 질문이, 내일을 만든다.

다음화 예고

은재가 ‘도성’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내려는 사이, 같은 밤 휴대폰에는 또 ‘오늘만’이 뜨고 도현은 그 문장이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한다.